누군가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by zoamie


점심시간에 맞춰 형님이 나오셨다. 새해가 10일이나 지나 처음 뵙는 형님.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새해인사를 드렸더니 여전히 얼굴 한가득 빛나는 웃음으로 맞아주신다. 지난주 휴가였다며 대체 어딜 다녀온 거냐면서, 직속 상사도 묻지 않은 내 휴가를 회사에서 가장 처음 물어주신다. 그리곤 새해 기념으로 바꿨다며 지난 포르투갈 여행에서 선물한 담배 케이스를 들어보이셨다. 외로워질 무렵의 포르투갈 여행에서 형님을 떠올리게 만든 멋진 콧수염 오토바이 아저씨가 그려진 빨간 케이스. 괜히 쑥스러워 만약 망가지면 as 해달라며 장난스럽게 웃는 형님을 보는 순간 정말 기뻐서 그제서야 내가 '언제쯤 그 케이스를 쓰시려나' 하고 내심 신경쓰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매번 이렇게 예상치 못한 감동을 주시는 분. 

벌써 2주 전인 12월말. 가장 아끼던 카드로 골라 형님께 손편지를 썼다. 그 또한 포르투갈의 한 미술관에서 산 것으로 마티스의 '이카루스'가 그려진 카드였다. 들인 수고로움에 비해 큰 소득이 없었던 작년 한 해를 반면교사 삼아, 올해 또 다른 하늘로 비상하길 바라는 나름의 의미와 소망을 담아 골랐다. 편지에는 그간 제때 전하지 못했던 감사한 마음을 솔직하게 담았다. 요즘은 도통 손글씨를 쓰지 않아 얼얼해진 손을 주무르며. 누군가 읽으면 마지막 인사로도 읽혀질 수 있을법한 편지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뭐 그런 셈으로 쳐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언젠가 하고 쌓아뒀던 일을 제법 때가 되어 털어놓게 되니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2주간 이병률 시집 '눈사람 여관' 책갈피로 꼽아두었던 손편지를 드디어 전했다. 실은 여러 사람들 앞이라 몇번 망설였지만 송년 겸 새해맞이 편지니 더 늦어지면 안될 것 같았다. 퇴근시간 즈음 인사를 드리면서 기습적으로 쓰윽. 쑥스러우니 혼자 계실때 읽어봐달라며 불쑥 내밀자 다시 붉게 번지는 미소. 내가 좋아하는 크고 넓은 미소. 그 얼굴이 꼭 다시 보고 싶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서둘러 채비를 하는 날 보며 또 어디를 가냐고 볼멘소리를 하신다. 오래 미뤄뒀던 '러빙 빈센트' 예매를 해뒀다는 내 말에 형님은 '보면 정말 참 성실해. 일도, 노는 것도. 제주도에서 멍하니 바다도 보고오고, 방어회도 먹고. 네가 여기서 제일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라고 말씀하셨다. '넌 잘 될거야. 잘 되어야만 한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항상 널 응원해' 형님의 무조건적인 응원의 말씀들. 여전히 내겐 유효하다.

'러빙 빈센트'는 기대만큼 좋았다. 정확히는 스토리보다는, 한컷한컷 정성스레 유화로 엮어진 화면들이 정말 아름다워 러닝타임 내내 넋 놓고 바라봤다.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에게 미안해졌다. 내게 그는 천재 화가였지만 스스로 귀를 자를만큼 히스테릭한 괴짜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나 또한 빈센트 생전에 숱한 오해들과 지독한 가난에 손가락질 해댔던 동네 사람들과 다를 바 없구나 싶었다. 자신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이 사무쳐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집에 가는 길. 누군가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실로 얼마나 큰 힘을 만들어주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한들 빈센트에게 그를 늘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동생 테오가 있어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처럼, 내게도 누군가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심지어 가족도 아닌 타인의 믿음을 받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하고 감사하고 큰 힘이 되어주는 일인지를. 당장 오늘 하루를 지나오며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루빨리 부응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